헤어질 결심

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 헤어질 결심 


코로나 이후로 영화관을 안 간지 꽤 돼서...
결국 오늘에 와서야 이걸 봤군요... 미안해요 감독님
그치만 영화관에서 안 본 걸 반성하는 중이니 봐주세요.

서래씨가 참 바다처럼 밀려오는 영화였습니다.
역시 멜로영화 거장!! 박찬욱!!!

그런데 이거 대중성 노리고 만든 영화 진짜 맞나요?
(맞는 거 같긴 해 이전 영화들 보면)



총평


아름답게 싸여있지만 아름답지 않은
품위있는 둘이지만 품위를 잃는 관계.
아름다운 사랑이지만 추잡한 사랑이기도 하며, 서래의 청록색 원피스와 같이 모호한 영화 같았다.

슬픔이 파도처럼 덮치는 사람이 있다면, 물에 퍼진 잉크처럼 서서히 물드는 사람이 있다 는 대사처럼
이전 작품들에서 나오는 강렬하고 광기에 젖은 성난 파도같은 사랑이 아닌 서서히 퍼져가서 채워지는 잔잔한 사랑을 영화로 만들고 싶었던 것도 같고.

그렇지만 까고 보면 결국 이것도 감독이 감독인지라 아무리 낮게 밀려오는 파도라도 바다의 깊음은 변하지를 않더라.
서로의 자부심도, 자존심도 내려놓는 미치도록 깊고 열렬한 사랑이었다.


사랑한다는 말을 쓰지 않고 사랑을 표현하는 법


저 폰은 바다에 버려요.
깊은 데 빠뜨려서, 아무도 못 찾게 해요.


해준은 서래에게 이렇게 말했고 서래는 이 말에서 해준의 사랑을 느꼈다.
그러나 해준의 그 말은 사랑이 아니고 오히려 끝맺기 위한 말이었을텐데...

서래가 해준의 거대한 사랑을 느낀 이 대사처럼 영화 내에서 둘은 서로 직접적으로 사랑을 표현하지 않았음에도 모두 이 둘이 사랑을 했다는 걸 느낀다...


둘은 취조실에서 얼굴을 마주할 때부터 서로에게 관심이 있었고
손에 낀 반지를 눈으로 좇는다거나, 보통의 살인 용의자에게 주지 않을 고급 초밥을 사준다거나, 그 사람을 따라가보기도 하고,
잠복수사를 빌미로 그 사람의 거처 주변을 살피기도 하고, 그 사람이 해준 말이 입버릇처럼 붙고...

진짜 서로 좋아한다는 말만 안 했다 뿐이지.
누가 봐도 서로 마음이 있다는 걸 알았으며 사건의 종결로 인해 '형사'와 '피의자'의 관계가 아니게 되자 자연스럽게 둘은 이어진다.
사실 첫눈에 반하고 썸타고 사귀는 걸 거의 30분 넘게 보고 있었던 거!!!


나는 개인적으로 해준이 핸드크림을 서래의 손등에 발라주고, 서래가 해준의 립밤을 자신의 입술에 바르고 해준에게 발라주는 장면을 정말 좋아하는데
아내가 있는 해준과 남편이 있었던 서래가 엮이는 건 아무래도 불륜이다 보니, 앞서 서로에게 마음이 있다는 걸 돌려돌려 보여줬던 것처럼
직접적인 스킨십 보다는 눈 가리고 아웅일지라도 간접적인 접촉으로 보여준 게 좋았다. 둘의 사랑은 서서히, 천천히, 알게 모르게 젖어간다.

특히 립밤을 바르는 장면은 해준이 서래를 떠나고 난 2부에서 또다시 나오는데, 그때 서래가 해준의 립밤을 자신의 입술에 바르고
해준에게 발라주려다 마는 것이 결국 그 둘의 사랑은 이루어지지 않는다는 걸 보여주는 것 같아서 더욱 아련해진다.


서래가 해준의 거대한 사랑을 느끼고 해준을 붕괴시킨 사건을 재수사 할 수 있게 증거품을 내미는 장면과,
"당신의 미결 사건으로 남고 싶었다. 이걸로 붕괴 이전으로 돌아가요." 라는 서래의 대사는,
해준이 자신의 신념과 자부심도 버리고 마지막 사랑을 고한 "바다에 폰을 던져요." 라는 대사와 대칭되면서 해준의 사랑에 대한 서래의 마음 또한 느낄 수 있었다.

웃긴 건... 이렇게 단둘이 있을 수 있는 곳에서조차 서로 사랑한다는 말을 안 한다는 거고.

사실 이전에도 거대한 사랑이긴 했지만~~!!
피냄새가 지독해서 피가 낭자한 현장을 무서워 한다는 해준의 말에 피로 가득찬 풀장의 물을 빼고, 바닥을 닦고, 시체에 물을 뿌려 피를 없애는
서래의 행동은 정말로 사랑하니까 해줄 수 있지... 사실 보통 사람이면 아무리 사랑해도 못해준다... 미친 사랑이니까 가능했다.


이어져선 안 되는 관계기에 이런 결말이 맞으며, 아름다우면서 추하고, 비극이다.
'이러면 안 되는데' 와 '하지만 사랑인데'의 경계를 계속 왔다갔다 넘나든다. 사랑한다는 말은 단 한마디도 하지 않았는데 둘의 사랑이 아프다.

산과 바다


박찬욱 감독 작품마다 늘 열일하시던 미술감독님은 이번에도 열일을 하셨다...

일단 나는 정말로 서래의 집 벽지가 저런, 산도 아니고 바다도 아닌 모호한 청록색의 벽지로 가득차있었다는 것에 입을 떡 벌렸고... (올드보이랑 친금 생각났어)
해준 만이 알아챘고, 해준을 위해 사건 현장을 치우고 증거인멸로 태운 서래의 옷도 산의 초록과 바다의 파랑이 합쳐진 청록색의 원피스였단 사실이 너무나도 좋았다.


하여튼 영화 포스터부터 메인 오브젝트로 작용한 산과 바다.

지혜로운 사람은 물을 좋아하고, 어진 사람은 산을 좋아한다는 대사도,
영화의 시작은 산이며 마지막은 바다인 것도 그렇고,
포스터에서 해준은 산, 서래는 바다로 둔 점도 좋았다.

그러면서도 해준의 해는 바다 해海를 쓴다는 것도... 해준이 서래를 만나고 어떻게 변화하는지, 어떻게 붕괴되고, 어떤 결말을 맞게 되는지 암시하는 것도 같고.


시작은 산, 그것도 우뚝 선 바위산에서 시작하여 해준은 곧고 우직하고 어진 산 같은 사람이었다... 만
사실은 바다를 좋아하는, '산 같은 사람' 이라는 모양에 자신을 끼워맞춘 모래사장 위에 쌓은 '모래 산' 같은 사람이 아니었을까 하는 생각도 든다.

그러다 바다인 서래가 나타나고 바닷물이 점점 다가와 채워지며 해준은 달라지기 시작한다.
모래로 쌓은 산이 무너지듯 산과 바다의 경계가 모호해진다 라고 느낀 지점이 서래가 해준을 재워주는 장면... 이라고 생각하는데,
바닷물이 밀려오고, 물 속으로 들어가, 생각없는 해파리가 되어, 있던 모든 일들을 자신(바다)에게 밀어내라는 대사로 점점 잠에 드는 해준은
사실 이미 산으로의 자신은 붕괴된 것이고 바다에 빠지게 된 건 아닌지...

그리고 마지막 장면의 바다도 정말 좋아하는데!!
서래가 모래사장의 모래를 파내고, 파낸 모래를 산처럼 쌓고(이게 중요함), 그 구덩이 안에서 들이치는 파도를 바라본 채 바다가 자신을 죽이기까지 기다리는 모습이
기도수 피살 사건에 제일 중요한 증거이자 범인인 자신을 버려 사건을 종결이 아닌 미결로 만들기 위한 것 같아서... 단지 해준이 자신을 기억하게 만들기 위해서.
직접적으로 죽음을 보여준 게 아니라 거품소리로 모호하게 서래의 죽음을 말해주면서, 파도에 붕괴된 모래산처럼 서래 또한 해준처럼 붕괴되었고,
산과 바다의 경계는 사라졌으며, 서래가 다시 바다로 돌아간 것 같아 좋았다.

해준이 서래가 있었던 곳을 헛돌며 계속해서 서래를 찾다가 점점 차오르는 바닷물에 젖고 파도를 맞는 장면도,
이미 해준에게 서래는 잊을 수 없을 정도로 깊은 흔적을 남긴 사람이라는 걸... 잔잔하게 밀려와 차오르는 바다처럼 서서히 잠기는 사랑같아서.

그리고 바다가 차오를 때 저 멀리 석양을 보여주는 컷에서 영화 포스터가 생각나서 정말로 으악!!! 했다.
마지막에 해준이 닿을 수 없었던 거대한 서래의 존재감과, 서래의 죽음과, 석양을 엮어낸 거냐고 진ㅉㅏ로;;

대중성을노렸다지만 마지막20분은 진짜로그냥오타쿠영화였다고요;;;